2019년 7월 24일 오전 9시 50분
우리는 벽소령 마당에 섰다.
원래 이쯤에서 이른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을까 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생각을 접었다.
대신 아무곳에서나 주먹밥을 먹기로 했던것.
암튼 이 벽소령은 우리의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곳이다.
멀리는 15년 전부터 가까이는 작년 겨울까지.
그동안 많은 변화도 있었다.
처음엔 화장실도 이동식이었다. 근처만 가도 냄새가 펄펄 풍기는 혐오스러운 곳이었으나 지금은 지리산의 전 대피소를 통해봐도 가장 깨끗하고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을 자랑한다.
취사장도 아픈 다리를 끌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던것을 이제는 대피소 초입에 환전 쌈박한 새건물로 지어놓았다.
제작년 전체 리모델링을 하여 독립형 침상은 물론 비싼 등산화를 가진 사람이 신발분실을 우려해 들고 다닐 걱정없이 열쇠로 채우는 신발장도 비치했다.
지리산 주 능선의 딱 중간에 위치하여 종주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벽소명월이 아름다운 - 그 이름도 예쁜 벽소령대피소.
그러나 이 번엔 사진 한 장 남기고 갈 길을 재촉한다. 놀다 가도 좋으련만..
까치수영
벽소령대피소에서 1.1km는 거의 평지길로 예전엔 차도 다녔던 공비토벌용 산판도로였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산 아래 풍경도 일품인 곳.
구벽소에 도착하여 잠시 쉬어간다.
이제부터 덕평봉을 올라야 하니까.
장거리 산행을 하려면 일단 페이스 관리가 중요하다는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함께하는 일행들과의 보조가 잘 맞는다면 금상첨화겠지.
우리의 원년멤버 네사람은 늘 보조가 잘 맞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함께 걸었다 헤어졌다는 반복해도 결국은 중요지점에서 거의 동시에 만난다. 그러니 함께 걷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
오전 11시 선비샘
물이 콸콸 쏟아질것으로 예상했던 선비샘은 어인 일인지,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거린다.
아마도 뭔가 샘을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는듯하다. 만든지도 오래 되었으니 한번쯤 재 공사가 필요한것 같은데..
우리 주위를 멤도는 학생들 때문에 겨우 물한통만 받아가지고 얼른 그 자리를 탈출했다.
사람들은 많지 않은 수량때문에 진짜 샘이라며 좋았하더라만.
모처럼 바짝 마른 의자에 앉아본다.
점심 먹기에 딱 좋은것 같긴한데 배가 덜 고픈 대장님들은 후미가 오기도 전에 일어나서 떠나버렸다.
흠,, 여기가 아마도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전망바위렸다.
하지만 겨우 바로 앞의 칠선봉이 보일뿐 나머지는 모두 구름에 가려버린 전망대
<같은 장소의 2017년 여름의 모습>
요렇게라도 보여줘야 하는건데 ㅎㅎ 자세히 보면 천왕봉 아래 작고 희게 빛나는 장터목대피소가 보인다.
암튼 우린 계속해서 구름속을 걷고 또 걷는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
그리하여 칠선봉에 왔다.
칠선녀는 안개 속에서 너울너울 희고 부드러운 옷자락을 날리며 춤을 추는듯,, 희뿌연 안개바람이 주변을 맴돈다.
예쁜 나리꽃도 엄청 많은데 좀 찍어보라치면 이런 모습이다.
오랫만에 동자꽃도 담아보고.
모두들 이쯤에서 말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신봉을 향한 마의 계단만 남았다고.
항상 그 계단을 오를쯤이면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니 더욱 힘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보통때와 다르다. 정말로 그 계단만 오르면 오늘은 더 이상 걸을 곳이 없으니까. 아주 천천히 웃으며 오를 예정이다.
여기를 어떻게 설명할까.. 추락주의 뒤편으로 얼굴을 내밀면 에어컨 백대가 돌아가는것 보다 훨씬 더 시원한 냉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린다.
아,, 그리워라~~~
저 곳의 시원한 바람을 담아올 수 있다면 이런 날 그 보따리를 열어,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행복에 퐁당 빠질 수 있을텐데.
산노을은 짐 줄이기 프로젝트에 적극 동참하여 오로지 티셔츠 두 벌로 이 긴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나중에 약간 후회는 했지만.
(사진마다 다 똑같은 옷이니 찍는 사람도 식상 ㅋ)
흘러넘치는 물 덕분에 매일 등물에 빨래까지 할 수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다. ㅎ
영신봉이 코 앞이다 보니 여유롭게 평소에 하지않던 짓까지 감행 중이다.
사진 찍어줄테니 올라가라는 한마디에 고분고분 말도 잘듣는 김대장. ㅎ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 위에서 찍은 사진은 별로였다. 밀려오는 안개에 얼굴도 잘 안보일 지경이라서.
영신봉 주위엔 유난히 꿀꽃이 많다. 따사로운 햇살이 잘 비춰주니 얘들이 자라기 좋은 조건인가보다.
영신봉에 왔는데 오후 두시십분밖에 안됐다.
남는 시간을 어찌할지.
바람부는 언덕에 이러고 앉아서 땀을 식혀(?) 본다만 축축하기는 안개가 더하다.
이 주변을 자세히 보니 예전에 너도 나도 텐트 짊어지고 산을 오르던 시절, 대단한 숙박터 였으리라 짐작이 간다.
너르고 평평하니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최고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단지 샘이 너무 멀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이 곳의 구상나무들은 키가 작다.
아마도 바람부는 언덕이고 해가 잘 드는 곳이며 경쟁상대도 없으니 더 이상 키를 키울 필요가 없었을것 같다.
바람은 이쯤 쏘이고 이제 세석으로 내려갑시다~
세석대피소의 샘은 조금 멀긴 하지만 수량이 풍부하고 사철 마르지 않는다.
겨울이 되어도 얼지도 마르지도 않는 아래 샘터에서 또 한번 시원하게 몸들을 닦았다.
저녁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넓디넓은 대피소가 너무도 썰렁할만큼 여자등산객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날씨때문에 포기한 사람이 많은건지, 어쨋든 밤엔 추워서 바람막이를 끼어 입고서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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