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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일지

[스크랩] 북한지(北漢誌)

by 혜산 2009. 2. 11.

 

[北漢誌]

 

북한지는 1745년(영조 21)에 성능스님(聖能 호는 계파. 대각선사)이 북한산성의 중흥사에 주지로 주석하면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전국승병의 총 사령관. 총 지휘자)직을 30년간 수행하면서 전국의 사찰에서 승병을 차출하여 산성 축성과 수비를 담당케 하고 그 직에서 물러날 때 후임자에게 업무인계 자료로 작성한 삼각산 내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지리서입니다.

 

북한산성은 지금부터(2009년 기준) 298년 전 숙종37년(1711년) 4월 3일부터 같은 해 10월 18일까지 약 6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완성한 실로 놀라운 축조물 유적입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난 후 수도 한성을 수비하기 위해서는 견고한 북한산성의 축성이 필요하다는 김우항(金宇杭)과 김중기(金重器) 같은 현명한 신하와 성능이라는 걸승(傑僧)이 있었고 신하의 주청을 받아들여 축성을 결단한 숙종임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북한지를 편찬한 성능스님은 전라남도 구례 지리산 밑에 있는 화엄사의 승려로서 어떻게 북산성 축성을 담당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스승인 각성스님(벽암대선사)이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과 남한산성(인조 4년. 1626년)을 축성하였고  화엄사 대웅전을 완공(인조 14년. 1636년)하였으며 성능 자신도 화엄사 각황전을 완공(숙종 25년. 1699년)하였기 때문에 스승 밑에서 축성법과 병력(승병) 통솔법을 습득하였기 때문에 스승의 뒤를 이어 북한산성 축성의 대업을 담당하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 됩니다.

 

성능은 승병을 유치하기 위하여 축성과 동시에 산성 내에 중흥사[중흥사는 승병의 군영(軍營)이란 뜻으로 치영(緇營)이라 불렀음]외에 12개소의 사찰을 새로 지어 승병을 분산 수용하였으며 그 12개의 사찰은 국녕사. 원각사. 부왕사. 보광사. 보국사. 용암사. 원효암. 상원사. 서암사. 노적사. 부왕사. 경흥사. 중흥사. 태고사 등으로 이중 중흥사 태고사 등 일부 사찰은 기존의 사찰 및 폐찰을 복원 또는 중창 하였으며 서암사는 고려 문인공 민지의 저택을 사찰로 중창 복원하였습니다.

 

국녕사는 가사당암문과 그 일대 성벽를, 서암사는 수문과 시구문(서 암문) 및 그 일대의 성벽을, 원효사와 부왕사는 부왕동암문과 그 일대를, 보광사는 대성문과 그 일대를, 보국사는 보국문과 그 일대를, 용암사는 용암문과 그 일대를, 상운사는 북문과 그 일대를, 원효암은 시구문에서 원효봉 일대를 수비토록 하였으며 그 밖에도 143개소의 성랑(城廊. 초소겸 막사)을 성벽 요소요소에 지어 승병을 분산 배치하여 성벽을 수비토록 하였습니다.

 

북한지를 보면서 관과해서는 안될 점은 이러한 혁혁한 공을 세운 성능 자신과 승병들의 역할이 이 북한지에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는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하는 불교의 교리에 의 한 깊은 수행의 결과이며 또 하나 당시 이조시대의 국책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을 배척하는 이른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공을 수록하여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그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국의 승병을 총 지휘하는 팔도도총섭이 대궐출입을 할 수 없었다고 하니 불교탄압의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을 축성하고 수비하는데 또 승병의 역할이 지대하였기 때문에 그 후부터 대궐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지에는 명승 및 주요 사찰마다 유명인사들이 지은 詩가 수록 되어 있고 그 외에 많은 내용들이 들어 있으나 짧은 한문 실력으로 해석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여기에 북한산 등산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중요한 부분만 번역을 하였으나 한문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여러 사람들이 나를 역사학자로 알고 있으나 역사학자는 아니고 단지 북한산이 좋아서 자주 오르고 그러다 보니 산성내 유적지에 안내간판을 보고서 오랜 역사와 많은 유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결과입니다.

 

북한지는 영인본이 발간 되었으나 재고가 없어 2006년 쯤에 교보문고에 부탁을 하여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을 3일만에 찾아 냈다는 연락을 받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 붙이고자 하는 것은 북한산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되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북한지에서와 같이 이미 숙종 때 북한산이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이조시대에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북한산도(北漢山圖)라는 그림이 규장각에 보관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사료에 의하면 고려시대 때에도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왔다고 합니다, 다만 일제시대 때 삼각산이란 이름과 북한산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혼용하므로서 야기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일제가 북한산으로 다일화 해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지도와 행정 서류에 두 가지 이름을 같이 표기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 .

이미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지도에 북한산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이제 와서 다시 삼각산으로 바꾸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 될 것이며 그런 노력으로도 100% 완전하게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또 다시 두 가지 이름이 되어 다시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밖에 모든 행정서류나 책자의 이름과 안내간판들도 모두 바꾸어야 하는데 그 비용 또한 상상 외로 많이 소요 될 것입니다.

남의 나라 지도에 이름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동해와 독도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 화면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구름 위 山上
글쓴이 : 山上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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